최근 우리나라 몇몇 학자, 기자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바로 삼별초 패잔병들이 오키나와로 갔다는 가설인데요, 왜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270년, 고려는 당시 무인들이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해하던 고려왕 원종이 몽골군을 데리고 옵니다. 당시 몽골군은 중국마저 떼려 눕힐 정도로 막강했어요. 그래서 무신들 대부분은 이에 굴종했지만 배중손 등 일부는 삼별초를 결성해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진도에 세워진 배중손 장군 동상 - 출처 : 예향진도신문>
그렇게 삼별초는 진도에 용장성으로 집합해 결사항전을 준비해요. 이때 배중손을 왕으로 떠받들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다짐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얼마못가서 몽골군과 고려 정규군의 공격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습니다. (1271년)
삼별초는 부랴부랴 제주도로 후퇴를 해서 제주도 북부지역에서 재정비를 합니다. 하지만 1273년 4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고려 정규군 1만군이 투입되면서 삼별초는 궤멸합니다.
<삼별초의 난 1270~1273 - 출처 : 나무위키>
그런데 삼별초는 궤멸을 한 게 아니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애초 이들을 진압하던 고려군들은 삼별초에 대해 동정을 갖고 있었고 생사의 기로에 놓이자 고려가 아닌 타국으로 가게끔 했던 것이죠. "너희 타국으로 보내줄게. 가거라"라는 노골적인 조치가 아니라, "내가 몽골군 눈치도 보이니까 대충 궤멸시켰다 얘기해놓을테니까 너희가 뭘하든 눈감아줄게. 다신 고려땅 밟진마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제주 항파두리 삼별초 항몽 유적지>
패잔병들은 막막했겠죠. 뱃길이 딱히 정해진 게 아니지만 죽는 것 보단 낫다싶어 배에 몸을 싣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항해는 초여름(음력 4월)에 시작됩니다. 이는 오호츠크기단이 강한 시기여서 동북쪽에서 바람이 많이 불어왔을 것이고 그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계속 가다가 오키나와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봤을 때, 음력 4월에서 8월까지 일본과 조선 사이의 바닷바람이 심하지 않다는 통계까지 있어 이들의 오키나와 항해는 더 신빙성을 높이고 있어요.

<초여름이 되면 한국에서 버린 쓰레기가 오키나와 해변으로 많이 온다. - 출처 : KBS>
그리고 아주 재밌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에이소 왕 무덤 건물의 기와양식이 삼별초 진도 용장산성의 기와양식과 닮았다는 것이죠. 진도 용장산성은 배중손 장군을 왕으로 모시면서 근거지로 다졌던 곳입니다. 계다가 만들어진 시기가 계유년(1273년)이니 학계에선 놀랄 수 밖에 없었죠.

의문을 품고 오키나와의 13세기 후반 당시 유물을 살피기 시작하니 삼별초(고려)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류큐국(오키나와)은 13세기 이후 해서 성이 많이 축조됩니다. 이를 구스쿠(성의 오키나와 언어)라 하여 오늘날에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축성기술은 고구려, 특히 고려의 축성기술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삼별초가 오키나와에서의 영향이 있었다는 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류큐국의 최초 왕릉에 발견된 기와장식, 구스쿠에서 가늠할 수 있는 축성기술이 13세기 삼별초에 의해 전래되고나서 류큐국의 농업기술 마저 발달했다고 합니다.
농업의 발달로 사람이 많아지니 체계가 조금씩 정비가 됐고 결국 14세기 말부터 남산, 중산, 북산이라는 류큐의 삼국시대가 도래하게돼죠. 사람들은 류큐국 역사를 이 삼국시대부터 비중있게 다루는데 이전까지 역사는 상대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방증인 것 같습니다. 비약일 수 있지만 삼별초가 정착하고 토착민들에게 그들의 여러 기술을 전해주고 나서부터 류큐국이 나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 같습니다.

<만국진량의 종>
琉球國者南海勝地而鍾三韓之秀
류큐(琉球)라는 나라는 남해의 아름다운 경승지로 삼한(三韓)의 우수함을 모두 갖추었고,
以大明爲輔車以日域爲脣齒
중국대명大明과는 보차(輔車 바퀴축과 바퀴)관계이고,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일본(日域)과는 순치(脣齒 입술과 치아)관계로 두 나라 사이에서 솟아난 봉래도(蓬萊島 신선이 사는 낙원)이다.
以舟楫爲萬國之津梁異産至寶充滿
배(舟)와 노(楫)로서 만국의 가교(津梁)가 되어 각종 물산과 보물이 가득하다.
류큐국이 중계무역으로 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 자리매김했을 당시 만국진량의 종을 만들었어요. 이때 자화자찬 격으로 위의 문구를 만국진량의 종에 새겼다고 하는데요. 이곳에 우리나라를 뜻하는 삼한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사실 중국과 일본이 지리상으로 더 가까웠음에도 우리나라를 제일 먼저 쓴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고려인, 그중에서도 고국을 떠나야만 했던 삼별초의 숨결이 류큐국에 많이 느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