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은 2014년에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해전입니다. 이 해전으로 칠천량 해전(당시 대장 : 원균)의 대패로 열세에 몰린 조선 수군의 상황을 극적으로 바꿨어요.
뭣보다 놀라운 점은, 당시 명량해전에 조선 수군의 수적 열세였는데, 전선에 참여한 주요 선박만 따져봤을 때 조선(한국)은 13척, 왜나라(일본)는 133척이었습니다. 즉 1:10의 비율로 이순신 장군님의 지략과 통솔력이 돋보인 해전이었죠.

(영상캡처 사진 출처 : Noryang Straits 1598 - End of the Imjin War DOCUMENTARY)
1) 이순신 장군은 엄청난 병력과 싸울 방법을 찾았는데 바로 지형과 파도였어요. 위 동그라미 표시가 된 곳이 바로 울돌목이라는 곳인데 파도가 거세기로 유명했지만 또 하나 특정시간이 되면 파도의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는 독특한 곳이었습니다.

2) 왜나라 전함이 그곳에 오길 기다린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 근처에 진을 쳤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당시 파도 방향이었는데 이때까지도 왜나라 수군은 파도 방향까지 유리했던 터라 승리를 예상했겠죠.

3) 결국 명량해협에서의 첫 교전이 시작됐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적장 "도도 다카토라"와의 대결이 펼쳐진 것인데, "도도 다카토라"는 앞선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복날에 개패듯 뚜드려팬 전력이 있어서 자신감이 대단했죠.

4) 이순신 장군은 필사즉생(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의 각오로 왜나라 함선들에 맞서며 거칠대로 거쳤던 파도 물살을 버텼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을 제외한 나머지 함대는 우왕좌왕하며 왜나라의 수적우세에 잔뜩 겁먹고 있었죠. 게다가 왜나라 전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물살의 방향은 이때까지도 변함이 없었어요.

5) 하지만 파도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변함이 없었던 것은 울돌목 특유의 거친 물결이었죠. 미친듯한 파도는 순식간에 왜나라 전함을 집어삼킬 듯 했고 왜나라 수군들은 갈피를 못잡고 자기들끼리 뒤엉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황을 기다렸던 이순신 장군은 즉각 왜놈들에게 포를 퍼부으며 13:133이란 열세에 불구하고 승리를 쟁취하게됩니다.

<도도 다카토라>
파도의 흐름을 파악하고 지형을 이용해 극적인 승리를 만든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통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그런데 이 명량해전을 일본에선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어처구니 없게도 당시 왜나라 수군의 대장이었던 도도 다카토라가 남긴 기록(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엔 왜나라의 승리라고 씌어있습니다.
*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 中 默記 (묵기)
御歸陣被成候
ちとまへかとにこもかいへ御こしなされ候
処にすいえんと申所にはん舟の大しやう分十三そうい申候
大川のせよりはやきしはのさし引御さ候 所の內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申候 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申候
それを見付是ともとり可よし舟手と御相にてはいまのせとをこきくたし候
儀はなるましきとていつれもせきふねを御かゝり被成
さき手のふねともハ敵船にあひ手負あまたいてき申候
中にも來島出雲守殿うちしににて御座候
其外ふね手の衆めしつれられ候
からうのもの共もくわはん手負討死仕候
処に 毛利民部大夫殿せき舟にて、はんふねへ御かゝり成候。
はん船へ十文字のかまを御かけ候処に、
はん船より弓鉄砲はけしくうち申候に付、
船をはなれ海へ御はいりなされ、あやうく候
処に、藤堂孫八郎、藤堂勘解由両人船をよせ、敵船をおいのけ、たすけ申候。
朝の五しふんより酉の刻まて御合戰にて御座候
みなとのやうすはん船能存候に付風を能見すまし
其せと口をめけほをひきかけはしらせ申について是非なくおつかけ申儀もまかいならす
いつみ樣も手を二か所おはせられ候
(당신께서 일본 진으로) 돌아가시기 조금 전에 제포(薺浦-경상우수영)에 가셨습니다.
'수영(해남에 위치했던 전라 우수영을 말하는 듯)'이라는 곳에 조선 대장선 13척이 있었습니다.
큰 강의 여울목에서 바닷물의 간만이 빠른 해역인데, 약간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에 13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반드시 잡겠다며 각 수군들과 상의하여 싸우게 된 것인데
큰 배(아타케)로는 이 좁은 해역을 저어나갈 수 없으므로 모두 세키부네(關船)를 마련한 후에 공격했습니다.
선두의 배들은 적선과 만나 많은 수군들이 부상당했으며
그 중에서 '쿠루시마 이즈모노카미 (来嶋出雲守 - 쿠루시마 미치후사 來島出雲)'님은 전사하셨으며 그 밖에 수군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가로(家老)의 과반수가 부상당하거나 전사할 때
'모리민부타이후 (毛利民部大輔 - 모리 타카마사 毛利高政)'님이 세키부네를 타고 적선을 공격했습니다. 적선으로 달려들어 적선에 십자 모양의 갈고리를 걸었습니다만,
적선으로부터 화살과 철포를 격렬하게 퍼부었으므로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위험에 처했는데
'토도 마고하치로(藤堂孫八郎)'와 '토도 카게유(藤堂勘解由)' 두 장수가 적선들을 밀어제친 후 구해드렸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싸웠습니다.
항구의 모습이나 적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바람의 방향도 잘 판단해서 그 좁은 해역을 벗어나 돛을 끌어당겨 달렸습니다. 그 때문에 적도 어쩔 수 없이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츠미 님(和泉樣 - 도도 다카토라 藤堂高虎)도 팔 두 군데를 부상당했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사항을 파악할 수 있는데요,
1. 일본군도 조선 수군의 규모를 13척으로 봤습니다.
2. 2014년 영화 <"명량">처럼 와키자카나 도도 다카토라가 후방에서 여유롭게 관망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고, 이들조차도 위험에 빠졌을 정도였고 그 중 하나는 부상까지 당했어요.
3. 일본군이 조선 수군 380여명을 죽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 당연히 이 수치는 과장된 것이지만 당시 조선군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현재까지도 불명이고 그나마 이순신의 대장선에서 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이죠.
- 다만 명량해전 당시 백병전이 발생했던 안위의 배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을 거라는 게 정론이죠.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이순신 장군 역시 안위의 배에서 격군 7~8명이 바다에 떨어졌지만 구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언급했던 명량해전 당시 유일한 백병전이 안위의 배에서 벌어졌는데 <"난중일기">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순신이 안위를 꾸짖자) (...) 안위가 황망히 적진에 들어가 교전하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적선 두 척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고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빠져 헤엄치니 거의 구할 수 없었다. 나(이순신)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고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대고 내가 탄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대어 적선 2척을 남김없이 잡았다. 천행이었다. 천행이었다!">
고산공실록을 보면 이 때 안위의 배에 달라붙었던 적선은 모리 타카마사가 이끌었던 세키부네 함대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당사자인 모리 타카마사와 관련된 전투 보고서 <"九月十八日付船手衆注進状">에는 이 상황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요.
<"(...) 모리 타카마사의 배 한 척과 도도 다카토라 가문의 배 한 척이 함께 조선 수군의 큰 배에 붙었고 모리 타카마사는 적선에 올라타서 서로 전투하다 두 군데에 부상을 입고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위대한 일이었고 즉시 모리 타카마사는 도도 다카토라의 배로 옮겨 타 무사했습니다.">
보다시피 공격에 가담한 적선의 수가 차이나는 것을 제외하면 (난중일기에서는 3척, 일본측 기록에서는 2척) <"난중일기">의 묘사와 거의 일치해요.
<요약>
1. 명량해전은 13:133의 수적열세에도 불구, 울돌목 파도와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이순신 장군의 통쾌한 승리.
2. 이순신 장군 : 적선 31척을 격침시켰고 이는 실로 하늘이 도운 일이었습니다.
3. 도도 타카토라 적장 :
일본군 선봉장이 사망했고 ,
총사령관 역시 중상을 입었고,
최고지도자가 보낸 감독관도 물에 빠졌다가 겨우 구조됐고,
수많은 다이묘의 중신들과 수군들이 대부분 죽거나 반 병신이 되거나 잡혀갔지만,
어쨌든 조선 수군도 명량해협에서 물러났으니 일본군이 승리했습니다.
??? : 아 우리가 승리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