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자, 독불장군 영화 제작자, 기록 경신에 나선 시험 비행 조종사, 천재적인 공학자,
할리우드의 바람둥이, 무모한 사업가, 기이한 행동과 괴팍함으로 유명한 은둔자 그리고 방치와 학대로 만신창이가 된 채로 죽음을 맞이한 인물.
한 사람에게 집중된 이 수식어들 중 일부는 영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들은 미국의 최고 갑부이자 억만장자였던 하워드 휴즈의 이야기이다.
< 하워드 휴즈 >
1976년 4월 5일, 텍사스주 휴스턴 감리교 병원에 존 T. 코너버라는 남자의 시신이 휴스턴 공항에서 병원 시체 안치소로 향했다.
이것은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존 T. 코너버는 유명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의 가명이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한 휴즈의 시신은 도저히 미국 최고의 갑부로 보기 어려울 만큼 처참했다.
그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휴즈는 심각한 영양실조와 탈수 증상으로 키는 188cm에 몸무게는 42Kg밖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체 곳곳에서는 심각한 부상들이 발견되었다.
두개골 부상, 찢어진 상처들, 각종 골절, 그리고 팔 속에 박힌 채 부러진 주삿바늘까지
이 시신이 미국 최고의 갑부 하워드 휴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 하워드 휴즈 시신의 부러진 주사바늘들 >
언론은 그의 충격적인 말로를 연일 보도하였고 미국 국민들은 부유하고 유능하며 강인했던 하워드 휴즈의 죽음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50년 이상을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살아온 하워드 휴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워드 휴즈는 엄청난 업적과 함께 기행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항공 공학자였던 그는 항공 역사를 개척해 나갔으며 비행 조종사로는 비행속도와 거리에 관한 신기록을 세우며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 하워드 휴즈(중앙)의 미국 횡단 비행 성공 축하 퍼레이드( 평균 시속 534km로 역대 최고 기록) >
그는 영화 제작자로도 명성을 떨쳤으며 유명 여배우 진 할로와 제인 러셀을 발굴했다.
< 진 할로 / 제인 러셀 >
또한 공학자로써는 항공 우주, 인공위성, 첩보기술을 선도했고 자본가로써는 라스베가스에 최초로 대규모 부동산 투기를 시작했다.
그는 타고난 도전가였으며 이는 그의 성공 요인이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으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괴팍하고 기이한 행동들이었다.
갑작스런 종적 감추기, 상식을 넘어선 크리넥스(휴지) 집착증,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는 영화 감상, 필기에 대한 집착으로 지시사항을 반복 기록,
극도의 세균 공포증에 시달리면서도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을 하지 않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그는 세간의 이슈가 되었다.
하워드 휴즈의 이런 이상 행동들을 당시 사람들은 그저 억만장자의 변덕이나 기행쯤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견해는 다르다. 의학적, 정신 분석학적 분석에 따라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보자.
하워드 휴즈의 어머니는 불결함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가진 중증 세균 공포증 환자였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과잉보호 속에 친구도 거의 없이 외롭게 자랐다.
< 하워드 휴즈와 그의 어머니 / 어린 시절의 하워드 휴즈 >
성장환경 때문인지 휴즈는 군중 속에 있는 것을 항상 불편해하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함으로 비치기도 했다. 어른이 된 휴즈는 부족한 사회성을 돈으로 메꾸었다.
( 하워드 휴즈는 사람보다 기계와 더 친밀했다. )
1905년 하워드 휴즈는 휴스턴의 대 부호 집안에서 태어났다.
휴즈 공구 회사를 가진 그의 아버지는 혁신적인 석유 시추용 드릴을 개발했고
뛰어난 사업 수단으로 전 세계 시장을 개척해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였다.
< 휴즈 공구 회사 >
덕분에 휴즈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워드 휴즈는 15살 때 직접 비행기를 몰수 있었고 이 경험을 계기로 비행에 푹 빠져들었다.
2년 간격으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면서 18살에 하워드 휴즈는 고아가 됐으며 막대한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업가보다는 비행기 조종사와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런 휴즈의 꿈은 그에게 뜻밖의 불행을 안겨다 주었다.
1976년 4월에 진행된 부검에서 의사들은 하워드 휴즈가 최소 3차례나 두개골 골절상을 당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첫 번째 대형 사고는 사망하기 약 50년 전인 1928년 그의 유명한 영화 ` 지옥의 천사들 ` 촬영 기간에 발생했다.
< 영화 지옥의 천사들 >
당시 역대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는 여배우 진 할로를 세계적인 여배우로 만들었으며 하워드 휴즈가 직접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 영화 제작 당시 하워드 휴즈 >
완벽한 공중 전투 신을 찍기 위해 많은 비행사를 고용했던 하워드 휴즈는 비행사 한 명이 위험한 저공비행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스턴트 비행을 했다. 그 결과 비행기는 추락했고 휴즈는 처음으로 심각한 뇌진탕을 일으켰다.
< 하워드 휴즈와 지옥의 천사들 공중 전투신 >
< 영화 지옥의 천사들 공중전 동영상 >
< 사고 당시 하워드 휴즈가 조정했던 비행기 >
하워드 휴즈는 추락 당시 얼굴과 이마를 조정실 계기판에 강하게 부딪치며 안와전두피질에 외상을 입었다.
안와전두피질은 뇌에서 오류 감지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으로 오차가 발생해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작동한다.
< 안와전두피질 ( 붉은 색 ) >
안와전두피질에 손상을 입을 경우 오류 감지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그의 첫 번째 사고로 인해 지시 사항을 집착적으로 반복해서 기록하는 이상 행동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
하워드 휴즈는 지옥의 천사들 제작에 꼬박 3년을 투자했다.
그동안 완벽한 장면이 나올 때까지 수많은 장면을 재촬영했고 밤낮을 쉬지 않고 편집 작업에 몰두했다.
주변 사람들은 휴즈가 완벽한 영화를 만들려는 강박증에 쌓여있다고만 생각했고 이것이 젊은 억만장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했다.
예산을 훨씬 초과하여 400만 달러를 쏟아부은 끝에 1930년 1월 30일, 그라우만스 차이니즈 극장에서 `지옥의 천사들 ` 첫 시사회가 열렸다.
역대 최대 규모의 시사회였으며 50만 명이 이를 지켜보기 위해 거리를 메웠다.
< 영화 ` 지옥의 천사들 ` 첫 시사회 현장 >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공중 전투신은 역대 최고의 장면으로 호평받았다.
이를 계기로 하워드 휴즈는 더욱더 비행에 빠져들었다.
하늘에서 휴즈는 대인공포증과 세균 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1932년, 휴즈 항공사를 설립한 하워드 휴즈는 회사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리고 가명을 써서 텍사스주 아메리칸 항공에 수화물 담당자로 취직했다.
수화물 담당자가 된지 몇 주 되지 않아 하워드 휴즈는 부조종사로 승진했고 그의 정체가 탄로나 자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하워드 휴즈는 비행기를 설계하기 시작하고 시험 비행에 나섰다.
그가 만든 첫 번째 비행기는 H1 실버불렛으로 날렵한 경주용 비행기였다. 휴즈는 이 비행기에 많은 신기술을 도입했다.
< H1 실버불렛 >
H1 실버불렛은 그의 공학적 천재성과 비행속도에 대한 집착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였다.
1935년 9월, 실버 블렛이 사탕수수밭에 불시착하자 하워드 휴즈는 그 즉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 불시착한 H1 실버불렛과 하워드 휴즈 >
그는 기자회견에서 사고 경위를 설명했고 직접 기자회견 장면을 감독하며 수차례 재촬영했다.
이 기자회견 하워드 휴즈는 계속해서 바지를 잡아당기며 눈에 띄는 불안 장애 증상을 보였다.
이것은 그의 정신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43년, 휴즈는 신형 수상비행기 S43을 조정하다 호수에 또다시 불시착했다.
< S43 불시착 >
그는 또다시 머리에 중상을 입었고 승무원 한 명이 사망했다. 같이 탄 승무원의 사망은 휴즈에게 큰 충격을 줬을 것이다.
이 사고로 하워드 휴즈의 괴이한 행동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세균 공포증으로 인한 반복적인 손 씻기는 어릴 적부터 계속됐고 자신의 업무와 지시 사항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확인했다.
또한 물건을 완벽하게 대칭으로 정돈하려고 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강박성 장애에 해당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강박성 장애가 잘 알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불가능했다.
1940년대, 하워드 휴즈가 설립한 회사들은 빠르게 팽창해나갔지만 그는 정신적 휴식을 취할만한 시간조차 갖지 못 했다.
그의 기행은 더욱 심해져만 갔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휴즈 항공사는 다수의 무기 개발 계약을 얻어낼 수 있었다.
HK1과 신형 고공정찰기의 시제품인 XF11이 여기에 해당했다.
하지만 두 사업 모두 휴즈의 잦은 설계도면 변경 때문에 예산과 기한을 초과하고 말았다.
< HK1과 XF11 >
특히 휴즈는 XF11을 차세대 비행기로써 선보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직접 시험 비행을 했다.
1946년 7월 7일, XF11을 탄 휴즈는 45분 동안 완벽하게 LA 상공을 높고 빠르게 비행하였으나
갑자기 프로펠러가 고장 나며 LA 골프장 근처 베벌리힐즈 주택 지붕을 뚫고 추락해버렸다.
< XF 11 추락 현장 >
이 대형 추락 사고에 사람들은 하워드 휴즈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휴즈의 상태는 위독했고 의사들은 살 가망성이 별로 없음을 휴즈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이 사고로 휴즈는 죽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두부 손상을 입었으며 3도 화상과 거의 모든 늑골과 경추 3개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 사고 당시 하워드 휴즈 >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하워드 휴즈는 다량의 진통제로 해결했다.
이후 10년 동안 하워드 휴즈는 매일 진통제를 먹었으며 그 양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여성들과의 스캔들은 그가 이룩한 항공분야의 업적만큼이나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1925년 헐리우드로 처음 왔을 때 하워드 휴즈는 아내가 있었지만 많은 여성들과 교제했고 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한 1946년엔 이미 이혼한지 오래였다.
잘생긴 외모에 부자였던 그는 여자들에게 선물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하워드 휴즈는 여성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감정적으로 그녀들에게 끌리진 않았던듯하다.
그는 동시에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자신의 연애행각이 들통 나지 않도록 비밀유지에 노력을 기울였다.
< 하워드 휴즈가 만난 헐리우드 여배우들 중 일부 >
컨피덴셜이란 3류 잡지에서 하워드 휴즈의 여성 관계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이에 하워드 휴즈는 격분했다.
하워드 휴즈는 잡지가 발매되자 자신이 만나던 여성들이 잡지를 보지 못하도록 모두 사들이라고 지시했다.
그는 영화제작자라는 위치를 이용해 여배우로 만들어주겠다며 끊임없이 신인 여배우들을 유혹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아파트와 생활비, 각종 연기 공부에 필요한 모든 교육비까지 지급했다.
휴즈는 여자친구에 대한 의심이 병적일 정도여서 탐정을 고용해 철저히 감시했고 그녀들이 먹는 음식부터 만나는 사람까지 모두 통제했다.
여자들과 교류하던 중 휴즈는 매독에 걸렸고 그의 세균 공포증은 더욱 심해졌다.
1950년대, 하워드 휴즈는 RKO라는 영화사를 소유하면서 헐리우드의 확고한 거물이 되었고
극비의 통신 및 첩보기술을 개발하는 대형 항공 우주회사도 설립했다.
1940년대 말, TWA 항공사를 인수받은 휴즈는 최초의 대륙 행단 노선을 만들어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1947년, 42살의 하워드 휴즈는 정부와 맺은 계약에 비리가 있다는 의혹을 받고 의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청문회에서 자신의 회사가 전쟁으로 인해 폭리를 취했다는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 청문회에서의 하워드 휴즈 >
청문회 내내 휴즈는 당당했고 의회와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워드 휴즈는 이때를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50대가 된 하워드 휴즈의 강박성 장애가 매우 심각해졌다. 그는 타인과의 악수는 물론 문 손잡이도 맨손으로 만지지 않았다.
회사 경영에 필요한 지시사항은 전화로 반복적으로 전달했으며 조금이라도 어긋날 시 불같이 화를 냈다.
1957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사업 파트너들과 친한 동료들까지 그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워드 휴즈는 이때 10여 년 동안 교제해온 진 피터스라는 여배우와 결혼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 진 피터스 >
휴즈가 진 피터스와 결혼을 결정한 이유에 대한 소문은 무성한데 그중 하나가 자신을 정신병원에 수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종적인 아내를 만들어 이를 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 수감을 결정하는 것은 아내 )
하워드 휴즈는 비밀 결혼식을 위해 진과 측근 몇 명을 데리고 네바다주로 날아갔다.
결혼식은 모텔 안에서 신부를 포함한 전원이 오리 사냥꾼 복장을 입은 채로 신속히 이루어졌다.
하워드 휴즈는 결혼한 지 1년도 안돼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기이한 일화를 남겼다.
1957년 11월, 그는 선셋 대로에 있는 나섹 스튜디오의 어두운 영상실에서 두문불출하며 4개월 이상을 지냈다.
그는 나체로 앉은 채 영화를 보며 초콜릿과 우유만으로 식사를 했고 회사 업무는 전화를 통해 해결했다.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하워드 휴즈) 주연의 에비에이터중 >
필요한 것들은 종이에 아주 자세하게 적어 측근들에게 전달했다. 측근들은 그를 볼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또한 휴즈는 수십 개의 크리넥스 휴지 상자를 쌓고 다시 쌓는 행동을 반복했다.
` 크리넥스 지침서 ` 라고 불리는 휴즈의 유명한 메모 속에는 크리넥스로 세균감염을 막는 방법이 장황하게 적혀있었다.
( 문 손잡이를 잡을 땐 8~10장을 사용 등과 같이 지침이 적혀있음 )
이 모든 것이 강박성 장애의 징후들이다. 4개월이 지난 후 드디어 하워드 휴즈는 영상실에서 나왔다.
몇 달째 목욕이나 면도도 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거지나 따로 없었다.
그는 나섹 스튜디오에 있는 동안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영상실은 나온 휴즈는 베버리힐즈 호텔에서 몇 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호텔 생활 동안 자신의 측근, 아내, 여자친구들을 위해 많은 객실을 임대하기도 했다.
그의 기이한 행동은 호텔에서도 계속됐다. 휴즈는 호텔의 분홍색 수건만은 걸친 채 나체로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휴즈 자신의 회사들을 계속해서 성장시키며 이끌어나갔다는 것이다.
하워드 휴즈의 거대 제국의 중추신경은 헐리우드 로메인 7000번가에 있었다.
직원들은 이곳을 요새라고 불렀고 휴즈의 개인 기록과 비밀문서, 사업 기록이 모두 이곳에 보관되어있었다.
< 로메인 7000번가의 하워드 휴즈 회사 >
이곳의 주 기능은 걸려오는 전화를 24시간 휴즈에게 연결해주는 것이었고 출입 가능한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1950년대 후반 하워드 휴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밀에 쌓인 세상을 등진 갑부로 묘사되었다.
그의 거대한 제국은 여전히 건재했다. 휴즈 공구 회사를 비롯한 RKO 영화 스튜디오, TWA 항공사, 휴즈 우주항공 회사, 그리고 엄청난 부동산까지..
특히 정부와 맺은 첩보 및 정찰 개발 기술은 누구도 넘볼수 없는 사업수단이었다.
하워드 휴즈는 자신의 오랜 심복을 해고하고 CIA와 연줄이 있는 전직 FBI 요원 로버트 메휴 ( 현재 휴즈 네바다 사업단 CEO )를 오른팔로 고용했다.
< 로버트 메휴 >
하워드 휴즈는 자신의 대리인인 로버트 메휴와 직접 만나는 일이 없었다.
메휴는 휴즈의 여자친구와 회사 직원 감시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하워드 휴즈가 소환되는 일도 막았다.
< 하워드 휴즈의 소환이 힘들 자 현상금까지 내검 >
FBI는 하워드 휴즈를 평생 감시하고 쫓아다녔다.
정부는 최대 군수 계약업체인 휴즈의 회사가 정치권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FBI는 휴즈의 정신 상태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휴즈의 사업 대부분이 국가 방위와 관련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법원은 TWA 항공사 자금을 부당하게 사용했다며 경영권을 포기하란 명령 내렸다.
( 지방의 작은 항공사를 하워드 휴즈가 국제적인 규모로 키워낸 것이 TWA 항공사 )
< 직접 TWA 항공기를 조정하기도 했음 >
하지만 회사 주식의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었던 하워드 휴즈는 매각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하워드 휴즈는 이 모든 사항을 어두운 호텔 방안에서 전화 와 쪽지만으로 해결했다.
또한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을 억제하기 위해 약물 사용량을 늘렸다.
1966년, 휴즈는 건강이 악화되자 애착을 가졌던 TWA 항공사의 주식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라스베가스의 데져트 인 호텔 펜트하우스에 투숙한 하워드 휴즈는
다른 고객이 사용할 수 있도록 펜트하우스를 비워달란 호텔의 요청에 호텔을 통째로 사들였다.
< 데져트 인 호텔 >
이것을 시작으로 휴즈는 아직 미개척지이던 라스베가스에 큰 투자했다.
몇 년 만에 하워드 휴즈는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하워드 휴즈의 기행은 더욱 이상해졌다. 충동적으로 지역방송국을 사들인 후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볼 특정 영화를 방송하도록 했다.
하워드 휴즈는 자신을 호텔이란 감옥 속에 가두어두었다.
하워드 휴즈와 이혼한 진 피터스는 그가 정신이상자이며 반사회적 성향의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 영화 에비에이터의 스틸컷 >
1970년 추수감사절,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밤중에 종적을 감췄다.
3주 후 바하마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워드 휴즈는 로버트 메휴를 해고했고 기업의 업무를 모르몬교 측근들에게 위임했다.
하워드 휴즈 제국의 내리막이 시작된 것이다. 이 측근들은 하워드 휴즈에게 통하는 모든 연락을 통제했다.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이 휴즈의 약물 의존증을 악용해서 그를 통제했다고도 한다.
이 기간 동안 하워드 휴즈는 세상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치밀한 사기극의 당사자가 될뻔했다.
1972년, 클리포드 어빙은 하워드 휴즈의 전기가 발간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빙은 세상을 등진 휴즈 덕분에 사기극의 성공을 확신했고 성공 직전까지 갔다.
< 실제 클리포드 어빙과 이 사건을 다룬 리차드 기어( 클리포드 어빙 ) 주연의 영화 혹스 : 욕망의 법칙 >
처음에 휴즈는 이 책에 관한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결국 전화 인터뷰에 응해 이것이 국민사기극임을 알렸다.
이 전화인터뷰는 대중에게 공개된 휴즈의 마지막 음성이기도 했다.
얼마 후 휴즈는 런던으로 건너갔고 이번에도 호텔에 묵었다.
1972년 6월, 하워드 휴즈는 다시 한번 비행기 조정에 나섰다. 조정석에 앉은 휴즈는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런던 상공을 비행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비행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런던에 추락하며 하워드 휴즈는 엉덩이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부상으로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휴즈는 진통제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하워드 휴즈는 1976년 4월 5일,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휴즈 가족묘지 >
하워드 휴즈의 부검에서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측근들이 그를 방치해서 죽음이 이르게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의 의사들은 여러 사고와 정신적 문제에도 하워드 휴즈가 오래 살았다는 것에 놀라워한다.
그만큼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부검 결과 오랜 기간 동안 다량으로 투여된 약물로 인해 회복 불능의 심장손상이 사인이었다.
하워드 휴즈는 평생 동안 진단받지 못한 강박성 장애, 여러 차례의 머리 부상, 엄청난 통증, 다량의 약물 복용에 의한 부작용과 맞서 싸워왔다.
만약 그가 현대의학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면 괴벽스러운 기인이 아니라 20세기의 천재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 하워드 휴즈 ( 실제 ) / 하워드 휴즈의 실화 영화 에비에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