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금입니다.>
빌 러프넥은 일어난 뒤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다시 눈을 감고 한차례 기지개를 켰다. 찌뿌드드한 몸이 조금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고 생각한 그는 눈을 떴다.
여전했다.
그는 감옥 안에 누워 있었다.
어젯밤, 평소처럼 직장을 마친 뒤 차를 몰고 집으로 왔다. 서류를 재검토한 뒤 자신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는 것까지는 분명하게 기억난다.
그런데 지금 이 진풍경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선 왼쪽 손목에 느껴지는 쇠고랑의 차가운 감촉이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장소라고 단정지었다.
어두운 회색 콘크리트가 전부였다.
단단해 보이는 회색 벽이 사방을 꽉 막고 있는 작은 방.
자신이 깨어난 침대는 쇠로 되어 있었고, 매트리스와 이불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얇았다.
문은 단 하나.
침대 옆 벽면 중앙에 튼튼해 보이는 쇠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쇠문 위쪽에는 작은 창 하나, 아래에는 식사를 넣어줄 법한 작은 여닫이 하나.
그리고 문 반대편 벽, 약 3m 높이에는 작은 창문이 나 있었다.
저렇게 높은 위치에 창문을 달 필요가 있었을까?
창의 크기는 20cm도 되지 않아 보였다. 설령 손이 닿는다고 해도 정상적인 체격의 성인이라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빌은 이곳을 감옥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리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이어졌다.
`내가 죄를 지었나?`
순식간에 반론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우선 빌은 전혀, 절대로 수감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게다가 어떠한 연고나 절차도 없이 이렇게 감옥에 처박히는 일이 말이나 되는가.
결론을 내린 빌은 자리에서 일어나 쇠문으로 다가갔다.
왼손에 채워진 쇠고랑은 방 전체를 무리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길었다.
빌은 문 위 작은 창으로 밖을 확인했다.
양옆은 보이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하얀 복도가 보였다.
혹시 범죄조직에게 납치당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빌은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쇠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텅텅텅-!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 응답도 없었다.
빌은 오기가 생겨 문을 더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드린 지 오 분 정도 되었을까.
구두 소리와 함께 반무테 안경을 쓴 백인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흰색 옷차림을 보니 의사처럼 보였다.
어떤 갱들은 일반인을 납치해 장기를 밀매하기도 한다던데.
빌은 끔찍한 상상을 억누르며 말했다.
"어, 저기요.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요."
"..."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빌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전 이런 상황에 처할 만한 어떤 일에도 동의한 적 없거든요.
아니, 그보다 여긴 대체 어디죠?"
남자는 여전히 빌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분석적인 시선이었다.
대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빌이라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 자신의 과제인 것처럼.
참지 못하고 빌이 다시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남자가 말했다.
"*** *****?"
빌은 귓구멍을 후볐다.
상대방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면 외국어를 썼거나.
"저기, 전 미국인이거든요. 영어 할 줄 몰라요?"
"****** ***** *******"
"에, 뭐라고요?"
"**** ** ***"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치 네댓 살 아이들이 횡설수설 떠드는 말 같았다.
혹은 아기들의 옹알이.
귀로 듣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소리가 아니었다.
청소년 은어라거나, 다른 민족의 언어라거나 하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그냥 소음이었다.
뭐지, 저 소리는?
빌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괴상한 중얼거림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초고속 재생된 뉴스를 듣는 느낌이랄까.
빌은 얼이 빠졌다.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던 남자는 흰 종이에 재빨리 무언가를 휘갈긴 뒤, 빌의 방 앞을 지나쳐 갔다.
"이봐요! 기다려!"
빌은 낙담한 채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감상 십여 분 넘게 두드려도 이번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쇠문을 걷어차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자 대답은 쇠문이 아니라 옆에서 들려왔다.
"보아하니... 새로 들어온 모양인데."
묵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침대가 놓인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빌은 번개같이 달려가 벽에 귀를 가져다댔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감이 들었다.
"이봐요, 옆에 있어요? 휴... 난 또 나 혼자만 있는 줄 알았잖아.
아, 당신도 여기 있어서 유감이 아니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에요.
아무튼, 내 말은... 왜 내가 여기 있느냐는 거예요."
옆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낄낄거렸다.
"퍽 재미있는 친구야. 이제 좀 심심하진 않겠어."
"이봐, 난 진지해요!
난 아무 잘못도 한 적 없다고! 왜 이런 빌어먹을 감옥에 갇혀야 하는지 난 몰라!"
옆방의 목소리가 목을 가다듬었다.
"흠... 글쎄.
나도 여기에 갇혀 있고, 당신 생각에 동의해. 당신은 죄가 없어."
"어떻게 아냐고?"
"나도 죄가 없거든."
잠시 뜸을 들인 뒤 그가 말을 이었다.
"아마추어 야구 선수였어.
배팅은 끝내줬지.
연습 게임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빌어먹을.
눈 떠보니 여기더군."
옆방 남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만큼 여유로웠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제기랄!
처음 보는 사람하고 싸우긴 싫지만, 솔직히 당신 따윈 관심 없어!
여긴 어디지?
왜 우릴 가두고 있는 거냔 말이야!"
잠시 침묵.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상대는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일단 친구, 자네 이름이 뭐지?"
"빌. 빌 러프넥."
빌은 차가워진 손끝을 초조하게 물어뜯었다.
"좋아, 빌.
잘 듣는 게 좋을 거야.
우선 나도 많은 걸 아는 건 아냐.
명심하라고."
잠시 후 그가 물었다.
"아까... 대화해 봤지?"
빌은 눈치가 빨랐다.
"그래요.
문 밖 그 빌어먹을 안경쟁이 말이지."
다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 안경쟁이 친구.
대화해 봤으니 알겠지만,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되지."
"그 사람만 있는 게 아냐.
이곳에도 사람이 많아.
그런데 우리처럼 갇힌 사람끼리는 문제가 없지만...
문 밖 사람들과는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어."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은 이해 못 해.
반대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우리도 못 알아듣고."
"나 같은 경우엔 어린애 떼쓰는 소리처럼 들리더군.
자네는 어땠는지 궁금하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무튼 다행인 건...
그 친구들이 우리를 해치진 않는다는 거야."
"가둬두긴 하지만 하루 세끼는 꼬박꼬박 가져다주지.
뭐.
메뉴가 훌륭한 건 아니지만."
"제길, 그런 건 관심 없어!
난 나가야 된다고!
내 삶! 내 식구! 내 직업!"
옆방의 목소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이전보다 훨씬 무거웠다.
"이봐, 친구.
아니, 빌이라고 했던가."
"그래, 빌."
"잘 들어둬."
"난 여기서 벌써 4년 남짓 보냈어."
"내 오른쪽 방에 네가 있고, 왼쪽 방에도 한 녀석이 있어.
이름은 케플러."
"케플러는 여기서만 13년을 보냈다."
잠시 침묵.
그리고 또박또박.
"13년.
이.
라.
고."
"그 말에 따르면 이 수감실을 살아서 나간 사람은 없대."
"네가 오기 전까지 네 방엔 보르주라는 늙은이가 있었어.
칠십 살쯤 됐지.
작년에 노환으로 죽었어."
"따분하긴 해도 좋은 할아범이었는데."
그는 작게 한숨 쉬었다.
"아무튼 그 늙은이가 죽고 자네가 온 거야."
"알겠어?"
"나가려는 기대는 접어."
"괜한 꿈꾸면 기분만 더 엿같아져."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참.
자살 시도는 꿈도 꾸지 마."
"혀를 물든, 벽에 머리를 박든...
놈들은 자연사하기 전엔 죽어도 살려내서 다시 방에 처박아두니까."
"케플러 옆방 녀석은 손목을 물어뜯어 동맥을 끊었는데...
평생 고정식 침대에 묶인 채 살았다더군."
구역질이 올라왔다.
빌은 간신히 삼켰다.
위액의 신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빌은 허물어지듯 침대 위로 누워 눈을 감았다.
옆방 남자 또한 그의 심정을 이해하는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빌의 수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옆방 남자의 이름은 제임스 헤더웨이였다.
갇혀 있었기에 직접 볼 순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건장한 흑인이라고 말했다.
아마추어 팀의 배터.
에이스 타자.
그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빌은 곧 깨달았다.
이 감옥에서 유일한 오락은 대화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제임스는 자살 같은 극단적인 생각을 막아주기에 최고의 대화 상대였다.
그는 유쾌했고,
빌은 능청스러웠다.
둘은 하루 종일 대화했다.
가끔 케플러가 시끄럽다며 불평해서 제임스가 반대편 벽으로 갈 때를 제외하면, 둘은 늘 이야기했다.
제임스가 케플러 쪽으로 갈 때면 빌도 반대쪽 벽으로 가곤 했다.
처음엔 그쪽에도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동안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야 제임스가 알려주었다.
그곳은 허공이었다.
빌의 수감실이 가장 마지막 방이었던 것이다.
빌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내 이야기.
직장 상사 이야기.
형편없는 월급 이야기.
그리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
제임스는 학창 시절 갱단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일.
야구를 처음 가르쳐준 삼촌 이야기.
그런 것들을 들려주었다.
빌은 문득 생각했다.
인간과의 교감에 반드시 육체적 접촉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래, 그랬다니까.
그래서 들어봐.
그래서 나는 그 얼간이한테 이렇게 말했지."
잠시 뜸.
"`억울하면 너도 내 거기를 차 봐.
야구공보단 덜 아프겠지만.`"
빌은 숨죽여 웃으며 콘크리트 벽을 탕탕 두드렸다.
재미있는 것은,
빌은 한국계 미국인이라 인종차별을 많이 받아왔다.
제임스 또한 흑인으로서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바깥세상이라면 서로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
그것이 정답이었을까.
아무튼.
그런 장벽을 넘어 두 사람이 이토록 거리낌 없이 우정을 나눈다는 사실에서 빌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들이 대화 외에 재미를 붙인 것은 성희롱이었다.
문 위의 작은 창으로 복도를 지켜보고 있으면, 가끔 흰색 옷을 꽉 끼게 입은 여자들이 지나가곤 했다.
"휘익! 이봐! 엉덩이 끝내주는데!"
제임스가 외치면 빌은 낄낄거리며 딴죽을 걸었다.
"빌어먹을, 취향하고는."
"그러는 자네는?"
"잠깐... 어, 지금 지나간다."
곧 흰 가운 위로 호피 무늬 브라가 비쳐 보이는 금발 여자가 지나갔다.
"휘유~ 오늘은 더 섹시한데?
그러다 터지겠어."
금발 여자는 요염하게 윙크를 하며 빌의 방 앞을 지나갔다.
제임스와 빌은 한참 낄낄거렸다.
그리고 만약 그녀와 섹스를 하게 된다면 어떤 체위를 해보고 싶은지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이 농담들을 그녀들이 알아들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냉큼 따귀부터 날리지 않았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감실 밖의 `자유로운` 사람들은 절대로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빌은 서서히 그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싫든 좋든, 본인도 그것을 인정했다.
현실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이 생활을 즐기기로 한 것이다.
물론 모든 일상이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갇혀 있다는 사실 자체는 늘 불쾌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진짜 참기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강제로 1:1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
그것만큼은 빌도,
유쾌한 제임스도 질색하는 일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쇠문 앞에 의자가 놓였다.
그리고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와서 앉았다.
그들은 질문을 했다.
물론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핵심은 그것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두 시간 동안 들어야 한다.
그것은 고역이었다.
더구나 그날은 식사도 한 시간 늦어졌다.
옆방 죄수들과의 대화 역시 금지되었다.
빌은 처음엔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단 하루 만에 포기했다.
소용없었다.
빌이 대답하든 말든.
남자는 흰 차트에 무언가를 미친 듯 휘갈기며 정확히 두 시간을 채웠다.
"***** *** *********** *"
"그래, 너 얼굴 한번 멋지다."
"..."
"혹시 아프리카계 흑인이랑 아랍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어?
그쪽 혼혈들이 꼭 너처럼 생겼거든."
빌은 문득 생각했다.
제임스가 이 농담을 들었다면 좋아하지 않았겠다고.
".....*?"
"흠.
의문형인 건 알겠네.
근데 대체 뭐라는 거야?"
"******* ****"
"닥치고 얼른 갔으면 소원이 없겠다."
요령도 없었다.
그들은 괴상한 소리로 쉼 없이 떠들다가 정확히 두 시간이 되는 순간 떠났다.
지겨운 일과였다.
그들이 가고 나면 몸이 축 늘어졌다.
빌은 이것을 신개념 고문으로 사용하면 누구든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잖아.
폭력성도 없고.
하지만 그것은 무언의 폭력이었다.
제임스 또한 그것을 두려워했다.
면담 하루 전이 되면,
유쾌하던 그도 말수가 줄어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제는 제임스 차례.
오늘은 빌 차례였다.
빌의 쇠문 앞에 철제 의자가 놓였다.
빌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의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그 빌어먹을 안경쟁이가 와서 기괴한 지껄임을 시작하겠지.
나는 두 시간 동안 질식당할 거야.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구두 소리가 들렸다.
안경쟁이가 걸어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은제 만년필과 종이를 꺼냈다.
"******* **?"
"몰라...
모른다고."
"**** ****"
"이런 씨발...
염병...
한두 번이라야지."
빌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왜 이런 빌어먹을 연극을 하는 거야?
엉?"
빌은 문으로 다가가 발로 세게 걷어찼다.
그리고 보았다.
안경쟁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고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빌은 침대 위로 올라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약 올리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놈이 한 수 위였다.
놈은 다시 피식 웃더니 만년필을 접어 웃옷에 꽂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빌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빌은 직감했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을 시작했다는 것을.
화가 난 그는 몸을 거칠게 뒤돌았다.
철걱.
왼팔에 연결된 사슬이 순식간에 침대 다리에 걸렸다.
동시에 몸이 뒤쪽으로 홱 끌려갔다.
시야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바닥 타일이 눈앞으로 달려왔다.
침대에서 몸이 기울어진 탓에 발은 아직 침대 위에 남아 있었다.
머리가 수직으로 바닥을 향했다.
눈앞에 붉은 불꽃이 번쩍했다.
그리고.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굉장히 큰 소리가 날 것 같았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허물어지는 시야.
짹—
짹—
벽에 난 작은 창문에서 참새 한 마리가 지저귀다 날아갔다.
빌은 힘겹게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머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고 다시 몸을 숙였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더듬어보니 흰 붕대가 감겨 있었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작은 창밖 하늘을 보니 식사를 받으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그 빌어먹을 면담도 있었으니...
한 시간쯤 더 기다려야 하려나.
빌은 침대에 누운 채 오른손을 들어 콘크리트 벽을 두드렸다.
"이봐! 제임스!
내 면담 끝나고 얼마나 지난지 알아?"
"..."
빌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귀머거리라도 됐어?
이봐! 제임스!"
그때였다.
"으힉... 히힉..."
낮은 톤의 묘한 웃음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쿵.
쿵.
쿵.
벽을 두드리는 소리.
"제임스?
누구야?
이봐요?"
빌은 벽에 귀를 붙이며 다시 물었다.
"크힉...
으히흑...
그극...
극...
이히히히..."
실성한 사람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리고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뒤.
제임스의 옆방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을 시작으로 복도 전체에서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웃음소리가 연달아 터져나왔다.
빌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행동했다.
있는 힘껏 쇠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제임스가 이상해졌다.
아니.
이 층 전체가 이상해진 것 같다.
말이 안 통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몸짓으로라도 알려야 했다.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내 옆에 친구가 이상해!"
텅텅텅—!
"누구라도 좀 와봐!"
그런데.
"또 무슨 일이십니까, 러프넥 씨?"
빌은 눈을 껌벅거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오히려 반응이 늦었다.
쇠문 앞에는.
호피 무늬 브라를 요염하게 드러내던 그 여자가 흰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어?"
"다친 머리가 아직 아픈 모양이군요.
곧 선생님을 호출해드릴 테니 기다리세요."
그녀가 지나치려 하자 빌이 황급히 외쳤다.
"이봐요! 기다려요!"
또각거리던 하이힐 소리가 멈췄다.
여자는 커다랗게 눈을 뜨고 돌아왔다.
"러, 러프넥 씨...
혹시...
제 말이 들리세요?"
"듣고 있—"
빌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여자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듯 외쳤기 때문이다.
"선생님!!
선생님!!
러프넥 씨 정신이 돌아왔어요!!"
그녀는 반대편 복도로 허겁지겁 뛰어갔다.
잠시 뒤.
요란한 구두 소리와 함께 안경쟁이가 나타났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러, 러프넥 씨가...
완치되었다고?"
"예.
그런 것 같아요."
안경쟁이는 미심쩍은 눈으로 빌을 바라보았다.
"러프넥 씨.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습니다.
당신 감정은 어떻습니까?
기쁠까요?
슬플까요?"
빌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물론...
슬프죠."
"좋습니다.
기르던 금붕어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기쁠까요?
슬플까요?"
"글쎄요...
기쁠 것 같은데요."
안경쟁이는 종이를 꺼내 미친 듯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급하게 기록을 마친 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군...
정말 믿을 수 없어...
이런 경우가 있다니..."
빌은 그 모습을 보며 점점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분노가 돌아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이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난...
난 이 염병할 곳에서 1년 넘게 억울하게 갇혀 있었어!"
빌은 말을 더듬었다.
"대체...
당신들 누구야?!"
그러자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자는 시선을 피했다.
안경쟁이는 안경을 벗어 접고 조용히 말했다.
"러프넥 씨.
지금 많이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당연한 거 아니오?!
빨리 이 문부터 열어요!"
"아니요.
그전에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빌은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러프넥 씨...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
"당신은...
가족들의 동의로 이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습니다."
"치료 목적이었죠."
"하지만 회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되어...
중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이곳에서 지내게 된 겁니다."
빌은 눈알을 굴렸다.
"내 몸은 멀쩡하오.
머리 좀 다친 것 빼곤 아무 문제 없다고!"
"대체 여기가 무슨 병원이오?"
안경쟁이는 품 안에서 작은 디스플레이 기기를 꺼냈다.
"직접 보는 편이 빠를 겁니다."
빌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입술이 벌어졌다.
"말도 안 돼..."
화면 속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우히히...
히힉...
커헉..."
그 남자는 미친 듯 팔다리를 휘저었다.
침을 흘렸다.
갑자기 쇠문으로 달려들어 몸을 박았다.
쿵.
지나가던 사람들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빌 러프넥이었다.
자기 자신.
"...이게 무슨."
안경쟁이는 디스플레이를 집어넣었다.
"이제 이해하겠습니까."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곳은 정신병원입니다."
"당신은 그동안 가족은 물론.
우리 의료진과도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증 환자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회복된 건..."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마 머리를 부딪힌 충격 때문일 겁니다."
"극히 희박한 확률로.
제정신으로 돌아온 거죠."
빌은 몸을 떨었다.
오한이 올라왔다.
그렇다면.
대체.
내가 겪은 1년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나는 지금 정상인가?
아니면.
그때 정상이라고 믿었던 쪽이 진짜였던 건가?
그때 정신병자는.
오히려 눈앞에 있는 여자와 의사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지?
빌은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저...
옆방 남자 말이오."
"이름이...
제임스 헤더웨이 아닙니까?"
간호사와 의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걸?"
"그가 직접 말해줬소."
"내 옆방이었잖소."
의사가 급하게 말했다.
"거짓말 마시오."
"누군가 알려준 거겠지."
"제임스 헤더웨이 씨는 5년 전 이곳에 입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끊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와 대화한 적이 없는 중증 환자입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빌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절규했다.
그들은 미치지 않았다.
단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지금 이곳.
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곳이 정상인들의 세계인가.
아니면.
아직 완전히 각성하지 못한.
스스로 정상이라 믿고 있는 또 다른 정신병자들의 세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