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안잡혀...”
재촉이라도 하는 것마냥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전화가 울리는 대신 늦어지는 시간만 보였기에
눈을 떼고 한숨을 쉬었다.
대리비를 5만 원까지 올렸는데도 잡히는 기사님이 없다는 건
오늘은 그냥 차에서 자라는 계시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거나하게 취해 조수석에서 졸고 있는
남편은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고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결혼 축하 주랍시고
신나게 소맥을 말아주던 남편 친구들 역시
자기들끼리 3차를 가느니 어쩌니 하며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그나마 덜 취한 내가
이 참담한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기분 좋게 마신 술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리듬감 있게 두드리고 있던 차에
어디선가 웬 남자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혹시 대리 필요하신가요? 어디로 가세요?”
작은 키에 순박한 인상을 한 것이
평소에 보던 대리기사 이미지와는 달라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절박함 때문인지 반사적으로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상당히 먼 거리였기에 조금 주저하던 남자는
곧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4만 원에 가 드릴게요. 어떠세요?”
난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다짜고짜 다가와 대리를 해주겠다는 이 남자가 못 미덥긴 했지만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체격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취했지만 남편이랑 둘이 있기에 허튼짓을 할 가능성은 희박했고
무엇보다 이 짜증 나는 상황을
확실히 해결할 수 있는 제안이었기에
거절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내비게이션에 집을 입력하고 뒷좌석에 오르니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하기 시작했다.
유쾌한 그를 보니 조금 마음이 놓였기에
평소답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시간도 늦었는데 힘들지 않으세요? 엄청나게 밝아 보이셔서….”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들 말씀 많이 하시더라고요.
뭐 늦게까지 일하면 힘이야 좀 들지만,
그냥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 하다 보니
웃음도 나고 기분도 계속 좋고 하네요.”
참 밝은 사람인 것 같았다.
매번 피로에 절고 세상에 물든 사람들만 보다가
밝은 기운이 도는 그를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비결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의 말에 난 호기심을 빛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트레스를 안 받는 거죠.
제가 예전엔 막 세상이 싫고,
아침이 싫고,
일하는 게 싫고,
사람이 싫고,
다 싫었거든요.
그러니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겠어요?
매일 같이 낯빛이 아주 썩어났죠.
그러다 어느 순간 뭐랄까.
초월했다고 해야 하나?
요령을 알게 된 거예요.
악착같이 일해서 돈 번다고 여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죽어라 꾸미고 구애한다고 좋은 사랑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 내려놓고 자유롭게.
그렇게 사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알기는 쉽지만 행하긴 어려운 이야기였기에
비결이라 하긴 어려웠다.
단지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듯한 그에게
살짝은 힘을 얻은 듯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전부 집어 던진 거죠.
잘 가던 직장 때려치우고.
가족이랑 연 끊고.
애인, 친구 할 것 없이 전부다 버린 거예요.
책임질 거, 신경 쓸 거 전부 버리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고요.
버는 대로만 쓰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신경 쓸 것도 없고 복잡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일 하면서도 즐거운 거죠.”
조금 이상한 이야기였다.
단순하게 건강한 마음가짐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었다.
슬쩍 앞 좌석을 보니
남편은 완전히 잠이든 듯 미동이 없었다.
불안한 와중에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가진 게 없으니까
뭐든 그냥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거예요.
진상손님이요? 제가 뭐가 부족해서 바싹 엎드려요.
감옥 가면 그만이란 마인드로 들이받고 말지.
안 그래요?
얼마나 행복해요.”
룸미러로 슬쩍 보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해맑고 즐거워 보였지만
하는 말은 전혀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순간 남자는 룸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진 거 없고 지킬 것도 없으니까.
마음도 편하고 미련도 없어요.
까짓거 죽어도 그만이라 이거죠.
그게 좋은 이유는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단 거거든요.
예를 들면…. 이대로 차를
어디 외진 데로 끌고 가서 두 분을 죽인다던가.
아니면 갑자기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덤프트럭에 정면으로 돌진한다던가.”
그는 미소를 띄운 채 룸미러를 통해 내 얼굴을 살폈다.
지금 이 남자가 농담하고 있는 것일까?
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는 천천히 휴대폰을 들었다.
“운전하면서도 휴대폰 꺼내는 건 다 보여요.
빛이 번쩍번쩍하네, 아주.
휴대폰 집어넣으세요.
저랑 얘기 중이잖아요.
제가 상처받아서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그냥 그거 얌전히 내려놓으세요.”
아무런 소리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남편을 봤지만,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
남자는 그런 내 표정이 우스운지
작게 큭큭 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남편분 깬다고 뭐 달라질 건 없어요.
운전대는 제가 잡았잖아요.
전력으로 나무를 때려 박을 수도 있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고..
말했지만 전 무서운 게 없거든요.
근데 그쪽은 아니잖아요.
남편도 있으시고 또 가족도 있으실 거고.
소중한 가족이랑 미래를 꿈꾸고 계시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조심하셔야죠.”
어느새 차는 속도를 높이고 있었고
내비게이션의 안내 대신 산길로 내달리고 있었다.
[경로를 벗어나 재탐색합니다.]
[전방 300m 앞에서 유턴입니다.]
[경로를 벗어나 재탐색합니다.]
[경로를 벗어나 재탐색합니다.]
당장 차에서 뛰어내려야 할까?
하지만 무사히 뛰어내릴 수도 없을뿐더러
남편을 버리고 도망갈 수도 없다.
눈앞이 뿌옇게 변하는 걸 보니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고는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돈 필요해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돈 필요 없어요. 그런걸 원하는 게 아니라.
자유?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거죠, 그냥.
웃기게도 제가 이런 거 엄청 재미있어하거든요.
놀리는 재미? 겁주는 재미 이런 거 있잖아요?
그쪽이 막 눈물 그렁그렁해서 겁먹는 것도 재미있고.
여기 남편분이 자는 척하면서
눈치 보고 있는 것도 재미있고.
깨셨으면 연기하시지 말고 눈 뜨세요.”
남편은 천천히 눈을 뜨고는
걱정스럽게 날 돌아보았다.
곧 강한 어조로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만 내려주고 차랑 지갑 다 가져가.
안전하게 내려주기만 하면 신고 안 할게.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렇게 하자.”
남자는 크게 웃으며 더욱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말 못 들으셨어요?
전 강도 같은 거 아니에요.
돈이고 차고 다 필요 없어요.
전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걸 즐기는 게 좋다니까요?
당신이 살려고 열심히 머리 굴리는 꼴이라든가 그런 거요.
무슨 생각 하는지는 뻔하거든요.
혹여나 덤벼들어서 몸싸움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뭐 힘이야 제가 한참 딸리겠지만
제 주머니에 쓸만한 것들이 많거든요.
싸우면 이기지야 못하겠죠.
대신 이 악물고 눈만 노려서 쑤실 거예요.
하나 쑤셔놓으면 남은 하나 쑤시는 건 일도 아니고.
그렇게 둘 다 쑤셔놓으면 아내분도 못 지키잖아요.
앞도 안 보이는 채로
아내분 비명만 들리면 얼마나 서럽고 화나겠어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괜히 위협적으로
덤벼들고 그러지 마시고 얌전히 계세요.
얌전히만 계시면 뭐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요?”
남편은 이를 악물었지만,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난 두려움 때문에 그저 떨 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다.
목숨이 아깝지도 않고 다치는 것도,
잡혀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뭔가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어떻게 하면 우릴 놓아줄 건데?”
남편의 질문에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저랑 게임 하나 하시죠.
지금, 이 순간부터.
두 분 다 소리 지르지도 말을 하셔도 안되고요.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시면 제가 이기는 겁니다.
아시겠죠?
5분간 말도 안 하고 또 움직이지도 않으면 제가 지는 거고요.
알아들으셨죠? 바로 시작할게요.
시작!”
대답도 하기 전에 시작된 게임에
나와 남편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얼핏 쉬운 조건 같았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잠시간 조용히 운전하던 남자는 천천히 속도를 높이더니
갑자기 라이트를 꺼버렸다.
늦은 밤 산길 도로에서 불빛 없이 운전을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혹여나 핸들을 조금이라도 잘못 돌린다면
그대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산 아래로 굴러떨어질 게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앞을 보니 남편 역시 불안한 듯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동안 어둠 속을 곡예 부리듯 운전하던 남자는
나와 남편을 슬쩍 돌아보며 웃더니
천천히 별안간 양손을 놓았다.
“이 미친 새끼가!”
남편은 더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다급하게 핸들을 잡아채려 했다.
“제가 이겼네요?”
하지만 남자는 예상했다는 듯
남편이 소리치는 그 순간 핸들을 잡고는
다시금 라이트를 켰다.
우리가 졌으니 이제 죽는 것일까?
나와 남편은 불안한 마음으로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재미있었습니다. 저랑 게임 해주셨으니
약속대로 안전하게 모셔드릴게요.”
의외의 말에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왜요? 제가 그랬잖아요.
그냥 저랑 게임 하자고.
이기면 풀어 주겠네. 지면 죽이겠네!
이런 얘기 안 했어요.
재미있게 놀았으니까
이제 안전하게 모셔다드릴 일만 남았네요.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계세요.
또 막 욕하고 그러시면 저도 진짜 화낼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말릴 새도 없이
블랙박스를 조작해 영상을 모두 포맷했고,
정말로 얌전히 차를 몰아 우리 집 앞으로 몰고 갔다.
“4만 원입니다.”
“너 이 미친 새끼가….”
마침내 차가 서자 남편은
남자의 멱살을 잡아채며 욕을 뱉어냈다.
“조심하셔야지요.
아까 제 말 못 들으셨어요?
손찌검하면 저도 안 참아요.
제가 이기진 못해도 무조건 눈 한두 개는 파놓겠다니까요.”
난 다급히 남편을 말리고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당신 내가 신고할 거야!”
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상하죠.
제가 한 짓이 신고당할 정도로
악랄하진 않을 건데 다들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신고하겠다. 후회하게 될 거다.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해주겠다.
죽여버리겠다. 어쩌고저쩌고..
근데 전 아직 여기 멀쩡히 서 있네요.
왜일 거 같아요?”
생글거리던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들 얼굴 똑똑히 기억했거든.
어디 사는지도.
지금까지야 딱히 악의는 없는데,
날 건들기 시작하면
그땐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어.
당신들 아이도 낳을거고. 가족들도 있잖아.
지켜야 할 것들.
그것들한테 불똥이 튀면 안 되잖아.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아무 일 없는 거야.
그러니까 선택해.
그냥 액땜했다 치고 잊어버리고 살던가.
답 안 나올 정도로 미친놈을 적으로 만들어서
평생을 덜덜 떨면서 살던가.
그거 알아?
진짜 무서운 건 가진 게 많은 나쁜 놈이 아니야.
가진 거 없이 악의만 가득 찬 놈이지.”
한동안 나와 남편을 죽일 듯 노려보던 남자는
이내 표정을 풀고는 다시금 발랄한 얼굴로 말했다.
“4만 원입니다. 손님.”
떨리는 손으로 만 원짜리 지폐 넉 장을 건네자
남자는 기쁘게 돈을 받아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앞으로 다시 볼 일은 없겠네요.
몸조심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냥……. 다 잊어버리자. 그리고…. 이사가자.”
남편의 말에 난 여전히 거칠게 뛰는 심장을 다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